
회의 필수품? 껌의 변신
언제 마지막으로 껌을 사보셨나요? 한때 계산대 앞 '잔돈 처리용' 단골손님이던 껌은 어느덧 잊혀 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껌이 지금, 가장 뜻밖의 장소인 '사무실'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껌의 위기

한때 '껌이라면 역시 롯데껌'이라는 CM송이 전 국민적 유행어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씹는 즐거움'을 대체할 거리가 늘고, 젤리나 사탕 같은 경쟁자들이 계산대 앞 명당을 차지하면서 껌은 서서히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실제로 국내 껌 시장 규모는 2015년 3,210억 원에서 2020년 2,540억 원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마치 수십 년간 같은 역할만 맡던 배우가 시대가 변하며 일자리를 잃은 것과 같은 신세였습니다. 껌에게는 새로운 '역할', 즉 새로운 존재 이유가 절실했습니다.
어느 대기업의 고민, "직원들이 집중을 못 한다"

이 미스터리의 첫 번째 단서는 의외의 곳에서 나타납니다. 일본의 거대 기업 'TOPPAN(토판)'입니다. 한국의 대기업 계열 광고·IT 서비스 회사와 유사한 이 회사는 급변하는 시장에 맞춰 대대적인 조직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직원들의 생산성'이었습니다.
8할의 비명: "사무실에선 집중이 안돼요"
TOPPAN의 내부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무려 80%에 달하는 직원들이 "업무 중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호소한 것입니다.이는 비단 TOPPAN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현대 직장인들의 공통된 고민이기도 합니다.
씹는 행위의 재발견
TOPPAN은 해답을 찾기 위해 '요조(養生)'라는 개념에 주목했습니다. 이는 한국의 '웰니스(Wellness)'나 '마음 챙김'과 유사한 개념으로, 일상 속 작은 습관으로 심신의 에너지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로 '씹는 행위'가 뇌 혈류량을 늘리고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과학적 사실입니다.
야구선수들이 경기 내내 껌을 씹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인 셈입니다. TOPPAN은 바로 이 지점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과자에서 '업무 도구'로, 껌의 부활

사건의 조각들이 마침내 맞춰집니다.
롯데: 줄어드는 시장에서 껌의 새로운 '사용처'가 필요했습니다.
TOPPAN: 직원들의 '집중력 저하'라는 명확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해결책: '씹는 행위'가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과학적 근거가 있었습니다.
롯데와 TOPPAN의 협업은 필연이었습니다. 롯데는 껌을 '과자'가 아닌 '집중력 향상을 위한 비즈니스 툴'로 재정의했고, TOPPAN은 자신의 사무실을 그 완벽한 실험 무대로 제공했습니다. 회의실에 비치된 껌은 더 이상 불량한 간식이 아니라, 생산성을 높이는 스마트한 도구가 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주방에서 베이킹 용도로만 쓰이던 '베이킹소다'가 냉장고 탈취제라는 새로운 역할을 찾아 시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킨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롯데는 껌의 맛이나 모양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대신 '껌을 씹는 이유' 자체를 바꾸는 영리한 전략을 택한 것입니다.
결국 잊혀 가던 껌의 부활은, 제품의 본질적 가치를 꿰뚫어 보고 시장의 요구와 절묘하게 연결시킨 날카로운 전략의 승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