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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의 장사학개론] 삼계탕은 어떻게 복날의 제왕이 되었나?
왜 복날에는 삼계탕을 먹을까요? 조선시대 복달임 풍습부터 오늘날의 삼계탕이 되기까지, 우리가 몰랐던 복날 음식의 변천사와 그 속에 담긴 사회, 경제적 의미를 알아봅니다.
자, 복날입니다. 당신은 지금 뭘 떠올리고 있습니까? 열에 아홉은 ‘삼계탕’일 겁니다. TV에서도, SNS에서도, 직장 상사의 점심 메뉴 제안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하죠.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삼계탕 집 앞에 길게 줄을 섭니다.
이거, 그냥 ‘다들 먹으니까’ 따라 먹는 걸로 보입니까? 천만에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봐야 합니다. ‘복날 삼계탕’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가장 완벽하게 설계된 ‘문화 상품’이자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오늘은 이 기막힌 성공 신화의 본질을 낱낱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1. 주인공은 원래 따로 있었다: 판을 뒤엎은 ‘신의 한 수’
놀랍게도, 원래 복날의 주인공은 삼계탕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복달임 음식으로 ‘개장국’, 즉 보신탕을 으뜸으로 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위를 쫓는다며 팥죽을 먹기도 했고요. 삼계탕이요? 그땐 명함도 못 내밀었습니다.
삼계탕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짧습니다. 1950년대, 일부 식당에서 닭백숙에 인삼 가루를 넣어 ‘계삼탕(鷄蔘湯)’이라는 이름으로 팔기 시작한 게 시초입니다. 잘 보세요. 이때는 ‘닭(鷄)’이 먼저 나왔습니다. 닭이 주인공이고 인삼은 거드는 역할이었죠.
그런데 1960~70년대, 판을 뒤집는 ‘신의 한 수’가 등장합니다. 바로 이름 바꾸기. ‘계삼탕’이 ‘삼계탕(蔘鷄湯)’으로 바뀐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고요? 닭보다 ‘인삼(蔘)’을 앞으로 내세운 순간, 이 음식의 운명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60년대부터 양계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닭고기 값은 싸졌습니다. 반면 인삼은 여전히 ‘귀한 약재’, ‘몸에 좋은 것’이라는 고급 이미지를 갖고 있었죠. 값싼 닭에 ‘귀한 인삼’의 이미지를 덧씌운 겁니다. 고객은 ‘싸구려 닭’이 아니라 ‘몸에 좋은 인삼’을 먹는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별것 아닌 이름 변경 같지만, 이것이 바로 고객의 지갑을 열게 만든 최고의 브랜딩 전략이었습니다. 개장국이 위생과 동물보호 이슈로 주춤하는 사이, 삼계탕은 ‘건강한 보양식’이라는 포지셔닝으로 완벽하게 시장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2.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최고의 마케팅
음식 장사는 단순히 맛으로만 승부하는 게 아닙니다. 고객에게 ‘왜 우리 가게에 와야 하는지’, ‘왜 이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명분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삼계탕은 이 명분을 ‘복날’과 ‘공동체’에서 찾았습니다.
‘더위는 뜨거운 것으로 다스린다’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은 과학을 넘어선 문화적 믿음입니다. 복날에 삼계탕을 먹는 것은 이 믿음을 실천하는 상징적인 행위죠. “오늘 같은 날 뜨끈한 삼계탕 한 그릇 해야 기운이 나지!” 이 말 한마디에 모든 논리는 끝납니다.
여기에 ‘함께’라는 기름을 붓습니다. 가족과 함께, 직장 동료들과 함께. 혼자 먹는 삼계탕은 그냥 닭 한 마리지만, 여럿이 ‘복날’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 먹으면 그건 ‘의식(ritual)’이 됩니다. ‘우리는 함께 더위를 이겨내는 공동체’라는 유대감을 확인하는 거죠. 미디어와 SNS는 ‘남들 다 먹는데 너만 안 먹냐’며 부채질을 합니다. 참여하지 않으면 소외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군중심리를 이용한 최고의 마케팅입니다.
3. 이것은 축제가 아니라 ‘전쟁’이다: 거대한 산업의 탄생
당신 눈에는 복날이 즐거운 음식 축제로 보일지 몰라도, 양계 및 유통 업계에는 1년 농사를 결정짓는 ‘전쟁’입니다. 복날이라는 단 사흘을 위해 수개월 전부터 공급량을 조절하고, 가격을 협상하며,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칩니다. 문화적 관습이 거대한 시장 경제를 이끄는 가장 확실한 사례죠.
이제 이 전쟁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레토르트 삼계탕이라는 무기를 들고 ‘K-Food’의 선봉장으로 나섰습니다. ‘건강한 한식’이라는 이미지를 앞세워 미국, 중국, 유럽의 식탁을 공략하고 있죠. 코로나19로 면역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졌습니다.

자, 정리해봅시다.
복날의 삼계탕은 우연히 탄생한 유행이 아닙니다.
첫째, 시대의 변화를 읽고 ‘계삼탕’을 ‘삼계탕’으로 바꾼 기막힌 브랜딩 전략이 있었습니다.
둘째, ‘이열치열’과 ‘공동체 의식’이라는 인간의 심리를 파고든 명분 만들기가 있었습니다.
셋째,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한 양계 산업의 성장과 거대 자본의 마케팅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복날에 삼계탕을 드실 때, 그냥 ‘맛있다’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역사와 문화, 그리고 치밀한 비즈니스 전략이 담긴 한 그릇을 마주하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