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당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빛이 당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FBK 편집부
작성일: 2025년 8월 8일
수정일: 2025년 8월 8일

한 끼에 200만 원이 넘는 식사, VR 헤드셋을 쓰고 즐기는 저녁. 음식의 가치가 신선한 재료를 넘어 ‘잊지 못할 기억’으로 매겨지는 시대, 소비의 패러다임이 송두리째 바뀌고 있습니다.

상상 초월 가격표, 우리는 왜 ‘경험’을 사는가

스페인 이비자의 ‘서블리모션(Sublimotion)’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레스토랑 중 하나입니다. 한 끼 식사 비용은 200만 원을 훌쩍 넘기죠. 선뜻 이해하기 힘든 가격표 앞에서 사람들은 왜 기꺼이 지갑을 열까요?

답은 음식 바깥에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기억에 남을 특별한 이야기, 그리고 SNS에 공유하며 과시할 수 있는 ‘사회적 화폐(Social Currency)’를 구매하는 것이죠. “나, 이런 경험까지 해본 사람이야”라는 한마디가 곧 지위의 상징이 됩니다. 이는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공간에 던져지는 감각적 쾌감, 즉 ‘경험재’에 대한 현대인의 열망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기술은 어떻게 경험을 설계하는가: 진화의 여정

성공적인 경험의 이면에는 언제나 치밀한 설계가 존재합니다. 특히 외식 산업에서 기술은 더 이상 보조 도구가 아닙니다. 경험의 핵심을 창조하는 주인공으로 진화하고 있죠. 그 여정은 몇 가지 뚜렷한 단계를 거칩니다.

출처 : Freepik

1단계: 빛, 공간의 배경이 되다

빔 프로젝터가 외식업에 처음 등장했을 때, 빛은 공간의 분위기를 돋우는 ‘배경’에 머물렀습니다. 벽면에 폭포 영상을 틀거나 바닥에 별빛 패턴을 뿌려 신비감을 더하는 방식이었죠. 이 단계에서 경험 설계는 ‘아름다운 무대를 만드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고객은 잘 꾸며진 공간 속 인물일 뿐, 경험의 중심에는 여전히 접시 위 요리가 있었습니다.

2단계: 셰프, 이야기의 막을 올리다

5.8센티미터의 작은 요리사, ‘르 쁘띠 셰프(Le Petit Chef)’의 등장은 판을 바꿨습니다. 프로젝션 맵핑 기술을 통해 빛은 벽지에서 벗어나 ‘내 접시 위’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파고들었죠. 꼬마 셰프가 가상의 재료로 스테이크를 굽는 ‘서사’가 펼쳐지고, 쇼가 끝나면 똑같이 생긴 실제 스테이크가 등장합니다. 이 순간 고객은 수동적 관찰자에서 쇼를 즐기는 ‘관객’으로 변모합니다. 경험 설계의 축이 ‘분위기 연출’에서 ‘스토리텔링’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3단계: 감각의 극대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다

‘서블리모션’ 같은 하이엔드 다이닝은 기술을 활용한 경험 설계를 극한으로 밀어붙입니다. 이곳에서 고객은 더 이상 관객이 아닙니다. 거대한 쇼의 ‘주인공’이 되죠. VR 헤드셋, 360도 스크린, 음향, 온도, 향기까지 모든 감각기관이 동원되어 고객을 완전히 새로운 시공간으로 이동시킵니다. 경험 설계의 목표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이야기 속에 살게 하는 것’, 즉 ‘완전한 몰입’을 구현하는 데 있습니다.

4단계: 테이블, 당신과 대화를 시작하다

출처 : Grand Hyatt Hong Kong 홈페이지

그리고 2025년 그랜드 하얏트 홍콩의 ‘더 매직 테이블(The Magic Table)’은 새로운 전환점을 예고합니다. 핵심은 화려한 영상을 넘어선 ‘상호작용’입니다.

출처 : Grand Hyatt Hong Kong 홈페이지

고객은 저녁 식사의 흐름을 바꾸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테이블 위 영상은 그 선택에 실시간으로 반응합니다. 주인공을 넘어 이야기의 결말을 바꾸는 ‘창조자’가 되는 것이죠. 기술이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단계를 지나 고객과 ‘관계를 맺는’ 단계로 진화했음을 의미합니다. 경험 설계의 패러다임이 ‘몰입’에서 ‘참여와 소통’으로 확장되는 순간입니다.

가장 화려한 기술이 가리키는 단 하나의 본질

이 모든 흐름이 거대 자본을 투입한 파인 다이닝에만 국한된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트렌드의 진짜 핵심은 값비싼 기술이 아니라 “내 고객은 이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한국의 자영업 시장에서 이 질문은 더욱 절실합니다. 첨단 기술이 없더라도 경험 설계의 핵심은 얼마든지 우리 가게에 녹여낼 수 있습니다.

희소성을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매일 한정 수량만 파는 ‘오늘의 비밀 디저트’나 단골에게만 제공하는 히든 메뉴는 소소하지만 강력한 특별함을 선물합니다.

서사를 구축할 수도 있습니다.

메뉴판 한편에 이 원두를 고르기까지의 여정을 짧은 글로 담거나, 매장의 음악 플레이리스트에 매달 특별한 테마와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만으로 공간의 깊이는 달라집니다.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다음 달 스페셜티 커피 원두를 손님 투표로 정하거나, 손님들이 남긴 메모를 인테리어의 일부로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고객은 가게의 일부가 된 듯한 유대감을 느낍니다.

결국 거대한 자본이 만들어낸 화려한 기술의 향연은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고객은 더 이상 단순히 물건에 돈을 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이야기와 관계에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기술은 그저 멋진 도구일 뿐,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결국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