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는 국밥이 심상치 않다
K-Food의 세계 정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김치와 불고기는 이미 ‘글로벌 스탠더드’ 반열에 올랐고, 매콤달콤한 한국식 치킨은 전 세계인의 소울푸드가 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했다. 바로 뜨끈하고 진한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국밥’이다. 이번 국밥 열풍은 과거의 유행과는 결이 다르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다.
K-Food의 세계 정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김치와 불고기는 이미 ‘글로벌 스탠더드’ 반열에 올랐고, 매콤달콤한 한국식 치킨은 전 세계인의 소울푸드가 되었다. 최근에는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등장한 ‘기사식당’이 현지인들의 ‘힙한 성지’로 떠올랐고, 유타의 푸드트럭에서 시작한 송정훈 대표의 ‘컵밥(Cupbop)’은 미국 전역을 휩쓸며 K-Food의 저력을 증명했다.
그런데 지금, 이 모든 K-Food의 성공 신화에 이어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했다. 바로 뜨끈하고 진한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국밥’이다. 그저 한인들의 향수를 달래주던 음식을 넘어, 미국 미식계의 지형도를 바꾸는 강력한 플레이어로 부상하고 있다. 이번 국밥 열풍은 과거의 유행과는 결이 다르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다.
미슐랭의 별을 받은 돼지곰탕, 뉴욕을 사로잡다

국밥 열풍의 진원지는 단연 뉴욕이다. 맨해튼에 문을 연 돼지곰탕 전문점 ‘옥동식(Okdongsik)’이 2023년 미슐랭 1스타를 획득한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맑고 투명하지만 입안을 꽉 채우는 깊은 돼지고기 육수는 뉴요커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그동안 K-Food를 ‘맵고(Spicy)’, ‘강한(Strong)’ 맛으로만 인식했던 이들에게 국밥은 ‘깊고(Deep)’, ‘섬세한(Subtle)’ 맛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푸드 칼럼니스트 피트 웰스(Pete Wells)는 옥동식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한 그릇의 수프에 담긴 미니멀리즘의 극치. 각 재료의 맛이 선명하게 살아 숨 쉬는, 고요하지만 강력한 한 방이다. 이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오랜 시간과 정성으로 빚어낸 한 편의 시(詩)와 같다.”
이러한 극찬은 국밥이 단순한 ‘든든한 한 끼’를 넘어, 고급 다이닝의 영역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음을 증명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바 테이블에 앉아 장인이 정성껏 말아주는 국밥 한 그릇을 받아드는 경험은, 이들에게 값비싼 프렌치 코스요리 못지않은 특별한 미식 체험으로 다가온 것이다.
동부에서 서부로, 왜 지금 국밥인가?
옥동식의 성공은 동부와 서부 해안 도시를 중심으로 설렁탕, 곰탕 등 다양한 국밥 전문점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LA 코리아타운의 전통 있는 설렁탕집들은 이제 2, 3세 교포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종의 고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들은 왜 국밥에 열광할까?
1. 웰빙과 ‘본 브로스(Bone Broth)’ 트렌드의 결합
미국 내 건강 트렌드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본 브로스’다. 콜라겐과 영양이 풍부한 뼈 육수는 건강과 미용에 좋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설렁탕과 곰탕은 바로 이 ‘본 브로스’의 원조 격이다. 미국의 음식 전문 매거진 ‘보나뻬띠(Bon Appétit)’는 “한국의 설렁탕은 수 세기 전부터 내려온 ‘궁극의 웰니스 수프(Ultimate Wellness Soup)’다. 인공 첨가물 없이 오직 뼈와 시간만으로 우려낸 깊은 맛은, 건강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의 니즈를 완벽하게 충족시킨다”고 분석했다.
2. ‘진정성(Authenticity)’을 향한 갈망
퓨전이 아닌, 한국의 전통 방식 그대로를 고수하는 점이 오히려 매력 포인트로 작용했다. 고객들은 직접 소금과 후추, 파를 넣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하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 이는 단순한 식사를 넘어 한국의 식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인터랙티브한 경험이 된다.
3. 위로를 주는 음식, ‘컴포트 푸드(Comfort Food)’

팬데믹 이후 사람들은 정서적 안정과 위로를 주는 음식을 찾기 시작했다. 국밥의 뜨끈하고 구수한 국물은 인종과 문화를 초월해 ‘엄마의 집밥’과 같은 보편적인 위안을 선사한다. LA의 유명 푸드 평론가 빌 애디슨(Bill Addison)은 LA타임스 기고를 통해 “설렁탕 한 그릇은 지친 영혼을 위한 담요와 같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형태로 위로를 건네는 음식” 이라고 언급했다.
한국과 같고도 다른 점, 그리고 주요 고객층
미국 국밥의 본질은 한국과 같다. 오랜 시간 정성 들여 끓인 육수, 그리고 밥이 핵심이다. 하지만 현지화 과정에서 몇 가지 차이점이 눈에 띈다.
같은 점: 맛의 핵심인 ‘육수’의 진정성은 철저히 지킨다. 깍두기, 김치 등 기본 찬 구성도 한국의 방식을 따른다.
다른 점:
프리미엄 브랜딩: 한국에서는 서민적인 음식으로 통하는 국밥이 미국에서는 ‘장인이 만든 건강한 슬로우 푸드’로 브랜딩되며 더 높은 가격대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세련된 공간: 허름한 노포 대신, 미니멀하고 모던한 인테리어로 젊은 층과 타인종 고객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선택과 집중: 메뉴를 간소화해 설렁탕, 곰탕 등 단일 메뉴에 집중함으로써 전문성을 극대화한다.
주요 고객층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1세대 한인들이 주를 이뤘다면, 지금은 K-컬처에 익숙한 20~30대 젊은 층, 건강에 관심이 많은 중산층 백인, 새로운 미식 경험을 찾는 아시안계 등으로 급격히 다변화되는 추세다. 이들은 SNS에 국밥 먹는 법을 공유하고, ‘#Gukbap’, ‘#Seolleongtang’ 등의 해시태그를 통해 자발적으로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
국밥의 미래, 제2의 라멘이 될 수 있을까?
국밥의 시장 확대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푸드 비즈니스 컨설턴트 앨런 박(Alan Park)은 포브스(Forbe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망했다.
“과거 일본의 라멘이 미국 시장에 안착한 과정을 떠올려보라. 국밥은 라멘보다 자극적이지 않고, 글루텐 프리(면 대신 밥) 옵션이 가능하며, 건강식이라는 강력한 서사까지 갖췄다. 이는 라멘을 넘어 미국 수프 시장의 주류가 될 잠재력을 의미한다.”
불고기와 치킨이 K-Food의 ‘화려한 외교관’이었다면, 국밥은 한국의 깊은 속내와 따뜻한 정을 보여주는 ‘진솔한 문화대사’다. 자극적인 맛의 시대를 지나, 이제 세계는 K-Food의 깊고 은은한 맛에 눈을 뜨고 있다. 한국인의 소울푸드였던 뜨끈한 뚝배기 한 그릇이, 이제는 전 세계인의 마음을 녹이는 새로운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 저녁, 뉴욕의 어느 거리에서 “Gukbap, please!”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