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곁에 김사부]용기가 본질을 바꾸는 순간들

[내곁에 김사부]용기가 본질을 바꾸는 순간들

김유진 논설위원
작성일: 2025년 8월 26일
수정일: 2025년 8월 26일

일본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햅쌀을 와인병에 담아내자, 마치 보졸레 누보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처럼 모두가 열광했다.

모든 것이 하얀 비닐봉투에 담기는 순간, 가치는 평준화된다

정보가 넘쳐흐르면서 모든 것의 품질이 비슷해졌다. 과거에는 진상품과 서민의 밥상 사이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가 상향 평준화의 길을 걷는다. 문제는 그 끝에서 발생한다. 모두가 뛰어나기에, 역설적으로 누구도 특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출처 : Freepik의 rawpixel.com

배달 앱에서 주문한 만 원짜리 떡볶이와 십만 원짜리 파인 다이닝 요리가 결국 똑같은 흰색 비닐봉투에 담겨 문 앞에 도착하는 풍경을 떠올려보자. 아무리 애써 만든들, 그 마지막 경험이 동일하다면 고객의 인식 속에서 둘의 가치는 흐릿하게 뒤섞인다. 사람들은 명품 박스는 조심스럽게 열어보지만, 흰 비닐봉투는 아무렇게나 북북 찢는다. 그 행위 속에 이미 가치 판단은 끝났다.

출처 : Freepik

포장은 상품의 옷이 아니라, 철학의 피부다

패키지는 단순히 무언가를 담는 기능적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만든 사람의 철학과 자부심을 드러내는 첫 번째 접점이다. ‘나는 내 상품을 이 정도로 귀하게 여깁니다’라는 무언의 선언이다. 고객은 포장재의 두께와 질감을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그 선언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비싼 커피일수록 종이컵이 두꺼워지는 건 우연이 아니다.

내 것을 보물이라 말하면서 값싼 상자에 담는 것만큼 모순적인 일은 없다. 그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하는 행위다. 비용을 핑계로 포장에 들이는 7~8%를 아까워하는 동안, 누군가는 12%를 투자해 리본을 묶고 더 견고한 상자를 만든다. 고객은 그 작은 차이에서 브랜드의 모든 것을 읽어낸다.

와인병에 쌀을 담는다는 것

일본 나가노현의 작은 마을 코타키는 고민에 빠졌다. 전국의 쌀 품질이 높아지면서 자신들의 쌀을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가. 그들은 침대가 아니라 과학을 팔았던 에이스침대처럼, 쌀의 상위 개념을 가져왔다.

출처 : コタキホワイト

평범한 쌀을 보졸레 누보로 만든 발상

그들의 해답은 와인병이었다. 햅쌀을 와인병에 담아 ‘그해의 첫 수확을 기념하는 귀한 선물’로 재정의했다. 쌀은 더 이상 주식이 아니었다. 와인처럼 시간과 떼루아를 담은 작품이 되었다. 이 기막힌 조합은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고, 서구 언론까지 앞다투어 소개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쌀’과 ‘와인병’이라는 두 요소를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결합했을 뿐인데, 세상은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다.

출처 : コタキホワイト

병을 바꾸자 상자가 필요해졌다

쌀을 와인병에 담자, 더 이상 비닐봉지에 넣어줄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고급스러운 박스가 필요해졌고, 와인을 열 듯 쌀을 마주하는 고유한 경험이 뒤따랐다. 담는 용기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상품을 둘러싼 모든 경험의 격이 달라진 것이다. 참기름을 늘 담던 소주병 대신 고급스러운 향수병에 담아 스프레이처럼 뿌려 먹게 한다면 어떨까. 그 순간 기름은 요리의 재료를 넘어, 공간의 향까지 디자인하는 감각적 도구가 된다.

당신의 상품을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

이제 당신의 상품을 재규정할 차례다. 당신이 파는 것은 삼겹살, 비빔밥, 전골이 아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보물인가, 보약인가. 그 정의에 따라 패키지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출처 : Freepik

삼겹살을 보물함에, 양념장을 보약 파우치에

투플러스 한우를 ‘보물’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면, 더는 평범한 멜라민 접시에 담아낼 수 없다. ‘이속우화’가 그랬듯, 나무로 만든 보물 상자를 열었을 때 비로소 고기가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 순간 고객은 고기가 아닌 보물을 마주하게 된다.

보쌈이나 족발을 ‘보약’으로 정의했다면 어떨까. 곁들여 나가는 소스부터 한약 파우치에 담아보자. 배달 패키지는 약방에서 보약을 지어 담아주던 손잡이 달린 종이 상자에 담겨야 한다. 고객은 포장을 여는 내내 자신이 보약을 선물 받았다고 느낄 것이다.

‘푸라닭’이 명품 더스트백을 닮은 포장 하나로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기꺼이 '아이디어 값'을 지불한다

같은 값, 같은 양의 족발이라도 흰 비닐봉투에 담긴 것과 보약 상자에 담긴 것 중 무엇을 기억하겠는가.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하고, 그 경험을 SNS에 전시하며 열광할 것이다.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을 넘어, ‘수준이 다른 생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비싼 용기와 패키지는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이디어에 값을 매기고, 고객이 기꺼이 그 가치를 지불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투자다.

당신의 상품은 어디에 담겨 있는가. 어쩌면 그 질문은, 당신의 상품이 무엇인지 묻는 것과 같은 말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