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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곁에 김사부] 비효율의 미학, 당신의 무기가 될 때
거대한 피라미드와 허름한 갈빗집에서 끝내 팔지 않는 공깃밥 한 그릇. 전혀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둘 사이엔, 사실 우리를 매혹하는 아주 기묘한 공통점이 흐릅니다.
쓸모를 초월할 때, 비로소 상징이 된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지극히 쓸데없는 건축물에 집착해 왔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떠올려보세요. 파라오의 무덤이라는 기능적 목적이 있지만, 그 본질은 압도적인 규모와 비효율성에 있습니다.

수만 명의 인력과 수십 년의 시간을 동원해 그저 한 사람을 위한 거석을 쌓아 올리는 행위. 그것은 실용성을 완전히 배반합니다. 파리의 에펠탑도 마찬가지입니다. 만국박람회를 위한 임시 구조물로 시작했지만, 철골을 그대로 드러낸 채 하늘을 찌르는 모습은 당시 건축의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거대한 철 덩어리일 뿐이었죠.

이 위대한 ‘쓸데없음’의 공통점은 명확합니다. 바로 과시입니다. 우리는 이만큼의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문명이다. 우리의 기술력은 이토록 정교하고 집요하다. 감히 우리에게 도전할 생각을 마라.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은 망원경도 없던 시절, 멀리서부터 적들의 사기를 꺾어버리는 심리적 방어벽이었습니다. 그 거대함과 비효율성이 곧 권력의 언어였던 셈입니다.
이는 현대 건축에서도 유효합니다.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왜 꿈틀거리는 티타늄 판으로 뒤덮여 있어야 했을까요? 단순히 그림을 걸기 위함이라면 네모반듯한 콘크리트 상자로도 충분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비정형의 형태, 기능과 무관해 보이는 파격적인 디자인이 쇠락해가던 도시 빌바오를 세계적인 문화 도시로 부활시켰습니다. 미술관의 ‘쓸데없는’ 외형이 그곳에 담길 예술품보다 더 강력한 상징이 된 것입니다. 결국 실용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잉여, 그 쓸데없음이야말로 평범한 존재를 대체 불가능한 아이콘으로 만드는 힘입니다.
더하는 것보다 강력한, 빼기의 미학
쓸데없는 짓이 언제나 거창하게 무언가를 더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결연하게 무언가를 ‘하지 않는’ 행위가 훨씬 더 강력한 엣지를 만들어냅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포터 교수가 전략이란 ‘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는 일’이라 정의했듯, 모두가 달려가는 길에서 이탈하는 용기야말로 가장 날카로운 차별화의 시작입니다.
신촌의 ‘서서갈비’는 이 빼기의 미학을 극적

으로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이름처럼 의자도 없이 드럼통 옆에 서서 갈비를 구워 먹는 곳. 하지만 이 집의 진짜 시그니처는 ‘밥과 김치를 팔지 않는다’는 원칙에 있습니다. 고깃집에서 밥을 팔지 않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주인장의 철학은 단호합니다. “나는 고기에는 자신 있지만, 밥을 맛있게 지어 따뜻하게 보관할 자신은 없다.”

이 고집스러운 결핍은 역설적으로 브랜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구축합니다. 고객들은 밥과 김치를 팔지 않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대신, ‘고기 맛 하나만큼은 최고’라는 무언의 약속을 얻어갑니다. 햇반과 김치를 주변 편의점에서 사 와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풍경은, 그 불편함마저 기꺼이 감수하게 만드는 이곳만의 독특한 문화이자 의식이 되었습니다. 만약 어설프게 사이드 메뉴를 추가했다면 어땠을까요? 고객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최고의 밥맛, 최고의 김치와 비교하며 냉정한 평가를 내렸을 겁니다. ‘고기 맛은 좋은데, 다른 건 영 별로네.’ 잘할 자신 없는 것을 과감히 포기하는 ‘쓸데없는 고집’이, 서서갈비의 정체성을 가장 선명하게 조각한 셈입니다.
삼겹살에 ‘정교함’을, 평범함에 균열을
쓸데없는 짓은 우리의 언어와 감각 속으로도 파고듭니다. ‘신선하다’, ‘맛있다’, ‘품질이 좋다’ 같은 단어들은 이제 너무 많이 소비되어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합니다. 모두가 사용하는 말은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의미의 틈새를 벌리는, 낯설고도 감각적인 단어의 투입입니다.

평범한 삼겹살집을 상상해봅시다. ‘최고급 국내산’이라는 진부한 문구 대신 ‘정교한 삼겹살’이라는 표현을 쓴다면 어떨까요? ‘정교함’이라는, 기계나 예술품에나 어울릴 법한 단어 하나가 고객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사람들은 고기의 두께가 왜 일정한지, 불판의 온도는 어떻게 유지되는지, 직원이 어떤 각도로 고기를 자르는지를 새삼스레 관찰하게 됩니다. 평범한 삼겹살을 먹는 행위가 하나의 잘 짜인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경험으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이런 언어적 유희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때 더욱 강력해집니다. 생맥주를 한 잔 내어주며 30초짜리 모래시계를 함께 건네는 행위. “이 모래가 다 떨어지면 맥주통에서 올라오는 잡내가 사라져 가장 맛있는 순간이 됩니다.”라는 설명은 단순한 맥주를 하나의 완성된 경험으로 격상시킵니다. 금테를 두른 수저, 독특한 질감의 냅킨처럼 먹는 행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소한 디테일들. 이런 쓸데없는 짓들이 1%씩 모여 30%를 채울 때, 사람들은 그것을 ‘예술’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효율을 넘어선 그 잉여의 영역에서, 비로소 감동과 충성이 싹트는 것입니다.
우리는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짓’을 제거하며 살아갈까요. 정해진 길을 최단 경로로 주파하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서, 잠시 멈춰 길가의 들꽃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낭비로 치부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비합리적이고, 가장 비효율적인 그 틈새에야말로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고유한 인장이 새겨지는 건 아닐까요.